상처받은 자들, 특히 과거의 상처로 인해 과거에 아주 사로잡혀 신경증, 우울증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경우에 정신분석은 유용하다. 과거를 호출하여 과거의 나와 과거의 타인이 화해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 하다못해 푸닥거리도 이 점에서는 유용하다. 

  이 원리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유용하다. 만약 일본이 과거 한국과 중국의 상처를 치유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현재의 일본 지도자는 스스로 그들의 조상을 호출하고 스스로 그 조상의 입장에서 과거 한국과 중국의 조상을 호출하여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독일의 지도자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지도자들, 특히 보수주의자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해 왔다. 독도는 우리에게는 해방의 상징임에도 반복적으로 일본땅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우리와 자신들을 과거로 돌아가게 하고 과거의 상처가 아물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안병직 전서울대교수와 그의 제자들(이영훈, 주익종, 김낙년 등)은 박정희의 산업화('근대화') 업적의 '공덕'은 이승만, 일제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생각하면서 그간 여러 연구와 발언을 통해 식민지 지배를 은근히 정당화해 왔다. 다양한 발언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일본이 없었으면 한국의 근대화는 불가능했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이것이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 인데 일종의 현대화된 식민사관이라 부를 수 있겠다.) 이영훈은 방송에서 일제 위안부여성과 주한미군 대상 성매매 여성을 동일선상에서 비유하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일본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산업화에 성공했는지, 일본 지배 때문에 성공했는지는 오랜동안 역사학의 논란거리였고 앞으로도 쉽게 결론이 나지는 못할 것이다.

  이들 친일 지식인들은 양적 지표를 들이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 자체가 말이 안된다. 첫째, 설령 철도부설, 공장건설로 성장에 10 만큼 도움이 되었다 해도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10 만큼 추가성장의 기회를 박탈 당해 20 만큼 성장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는 실험이 불가능하니 그 양적 관계를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사실 성장이란 양적이라기 보다 질적인 요인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질적으로 조건만 갖추어지면 선진국에서 수백년 축적된 생산력을 단 시일내에 구현하는 생산기반을 구축할 수 있고 대부분 후발 자본주의가 일단 자본주의적 개발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연평균 10% 성장은 쉽게 달성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산전백해라고 하지만 한국이나 아시아 국가들, 최근 중국이 그렇게 하고 있다. 30년만 하면 산전벽해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과 아시아는 일본이나 서양지배 받지 않고도 근대화했고 또 하고 있다. 조선은 이들 국가보다 못해서 일본 도움 없었으면 근대화 못했다는 말인가? 

  아프리카는 시장경제하기 위한 질적 조건을 확보하지 못한 관계로 세월이 흘러도 지지부진하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일본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면 조선도(그리고 지금의 한국도) 아프리카 짝이 났을 거라고는 말 못할 것이다. 즉 일본 덕분에 그러한 산업화의 질적 조건을 갖출 수 있었다고는 말 할 수 없다. 한국이 박정희 시기에 이러한 자본주의 산업화의 질적 조건을 마련하고 경제적 도약을 시작한 데는 일제 지배로 인해 상처입은 자존심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고야 말겠다는 한국인의 염원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보자면 과연 일본은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당사자가 됨으로써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일본은 한국의 성장에 일부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들은 친일 지식인의 과도하고 꽤나 상식을 벗어난 주장을 정당화할 만한 사실들은 아니다. 개인에 있어서도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려면 잘 되었건 못되었건 자신이 과거 축적한 지식과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미래가 과거없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질 수는 없으니 뒤의 일은 앞의 일과 연관이 있게 마련이다. 같은 이치로 한국의 발전한 현재가 과거와 일정한 관련을 같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현재의 한국은 과거 일본의 '가르침' 때문에 가능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건 부당하다. 실증사학이라는 것이 괘변으로 돌변하는 지점이 여기인 것이다.

  사실 길게 갈 것도 없이 식민지 근대화론이 괘변이라는 사실은 다음 가상적 질문을 해보면 바로 알수 있다. 일본 없이 한국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면 2015년 지금 이 순간까지 한국이 여전히 일본 식민지로 있었다면 현재의 한국보다 더 선진국되어 있어야 한다. 이 질문에 답이 궁색하니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또 이렇게 나올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고 타국의 종이 되어 굴욕을 당해봤으니 정신을 차리고 노력해서 한국민도 이제 선진 자유민이 될 수 있었던거야"라고. 말이 꼬이면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다 결국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고 만다는데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이 꼴이다. 남의 종은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자유인으로 서지 않는 한 노예의식이 서서히 몸과 마음을 장악하여 영원히 노예로 산다. 자유인이 아닌 자는 인간이 아니며 근대적인 발전은 있을 수가 없다. 남의 종살이 하면서 떡고물 좀 얻어먹고 어깨넘어로 신식 기술 몇가지 배웠다고 노예정신을 가진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가 선진국 될 수 없음은 상식이다.  

  세계경제 성장의 축이 아시아로 이동함에 따라 일본의 미래기회도 아시아에 있을 것이건만, 미국에 기대어 마치 이러한 경제축의 이동을 질투하는 듯이 대립적으로 나가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의 경제-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타국에 대한 질투와 초조만 커지는 것인가. 세계경제의 모순과 각국 내부에서 누적된 문제가 이러다가 아시아에서 국가간 심각한 갈등, 파국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점점 커지는 상황이다.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특히 한국은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이 긴요하다)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태도가 호혜적 번영의 길로 함께 나아가는데 있어 긴요하다 할 것이다. 한국의 친일 지식인들도, 그들이 진정 일본을 흠모하고 존경한다면 작금의 아베정부의 행태에 대해 침묵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아적 태도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판을 해야 할 것이다.  

  2013년 6월 4일 영국의 파이넨셜타임즈지에서 어떤 컬럼리스트(James Clad & Robert Manning, "How Abe could win the Nobel Peace Prize")가 이런 흥미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만약 아베총리가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인정하는 선언을 한다면 이는 엄청난 사건이 될 것이며 그가 노벨평화상의 유력한 후보가 될 수도 있다." 이 생각은 좀 오버인 듯하나 어쨌든 의미있는 발상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일본 천왕이 한국에 와서 일제강점에 대해 사과하게 만든다면 노벨상 후보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받을 것이다. 이들은 최근 일본의 역사학자, 예를들어 노리오 쿠보이 같은 학자의 주장에 공감을 표하고 있다. 이 일본학자는 독도문제가 영토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된 것은 일본의 조선지배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말이고 그 지배의 부당성 만큼 독도는 한국영토라는 것을 인정하는 논리로 연결된다. 일본이 이런 점을 인정하고 또 이에 더해서 과거 군 위안부문제같은 반인권적 행위에 대해서까지 일괄 사과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단번에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우호적 관계로 바꿀 수 있다. 이로써 양국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수 있다.

  한국사람들은 점점 더 보편주의적 세계관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일본은 거꾸로 민족주의로 회귀하는 일은 아시아의 평화 번영에 암운을 던지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이 소아적 태도를 버리면 모든 길이 열린다.

+ Recent posts